결혼식의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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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9-05 13:31 조회5회 댓글0건본문
몇 해 전 아들의 결혼식을 앞두고 우리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개신교 신자인 아들과 가톨릭 신자인 예비 며느리. 두 젊은이의 사랑 앞에서 종교의 경계선이 예상보다 높고 견고했다. 목사를 초대할 수도, 신부를 초대할 수도 없는 상황. 결국 우리는 주례 없는 결혼식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혼주인 양가 아버지가 축사하고, 지인 목사가 축하 기도로 갈음하는 형태로. 돌이켜보니 이 작은 해프닝이 우리 시대 결혼식의 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전통과 현실 사이에서, 의례와 편의 사이에서 우리는 새로운 형태를 창조해 내고 있다. 최근 한국 젊은 미혼자 중 67%가 주례 없는 결혼식을 선호한다는 조사가 있다. 결혼식이 단순히 ‘우리 결혼해요’ 하는 달콤한 고백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결혼식은 인류가 수천 년간 공들여 만들어온 가장 정교한 통과의례(rite of pas-sage) 중 하나다. 유교 전통에서 주례는 단순한 사회자가 아니었다. 그는 부부에게 인생의 지혜를 전하는 현자였고,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세월이 축적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기독교 전통에서 사제의 축복은 더욱 장엄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두 영혼을 하나로 묶는 신성한 의식, 그 앞에서 부부는 그들의 사랑이 개인적 감정을 넘어 우주적 의미를 갖는다는 걸 깨달았다.
통과의례로서 결혼식이 지닌 힘은 네 개의 기둥 위에 서 있었다.
첫 번째는 ‘공적 선언의 마법’이다. 침실에서 나눈 속삭임이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선언이 되는 순간, 사랑은 법적·사회적 보호막을 얻는다. 더 이상 변덕이나 충동의 영역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의 세계로 입성하는 것이다. 사적 영역의 은밀함이 공적 영역의 당당함으로 탈바꿈하는 드라마틱한 순간이다.
두 번째는 ‘상징의 마법’이다. 반지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다. 무한의 원을 그리며 영원한 사랑을 담는 그릇이 된다. 서약은 평범한 말이 아니라 미래를 묶는 주문이 된다. 절과 인사는 과거 세대의 지혜와 축복을 현재로 끌어오는 의식이다. 연금술사가 납을 금으로 변화시키듯, 평범한 사물이 의미의 보석으로 변신한다.
세 번째는 ‘공동체 승인의 마법’이다. 가족과 친지의 박수는 단순한 축하가 아니다. ‘우리가 이 결합을 인정하고 지켜보겠다’는 사회적 보증서다. 외로운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부부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수백 명의 하객이 무언의 증인이 되어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법정에서처럼 엄숙하게 지켜보는 것이다.
네 번째는 ‘변화의 마법’이다. 의례는 단순히 현실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창조한다. 결혼식을 치르기 전과 후의 ‘나’는 존재론적으로 다른 존재가 된다. 심리적으로도 정체성이 강화되고,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여는 용기를 얻는다. 어제까지의 ‘나’와 내일부터의 ‘우리’ 사이에 놓인 마법의 다리가 바로 결혼식인 셈이다.
결혼식 본질적 가치 되새기며 재창조해야
그런데 요즘 결혼식 풍경을 보면 묘하다. 주례는 사라지고, 정해진 순서는 부부의 플레이리스트로 대체된다. 하객은 경건한 증인에서 인스타그램용 사진을 찍는 관객으로 변모했다. 결혼식이 ‘평생의 서약식’에서 ‘하루의 파티’로 성격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유행의 변화가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거대한 시대정신이 결혼식장에도 상륙한 것이다. 절대적 권위에 대한 의심, 보편적 진리에 대한 거부감,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문화가 예식장의 단상에서도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모더니즘 시대의 결혼식은 클래식 음악회 같았다. 정해진 악보, 격식 있는 연주자, 경건한 청중.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고 예측 가능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의 결혼식은 재즈 세션에 가깝다. 즉흥 연주, 자유로운 해석, 관객도 함께 참여하는 인터랙티브한 무대. 때로는 실험적이고 파격적이어서 기성세대의 눈썹을 찌푸리게 하기도 한다. 야외에서 벌어지는 스몰 웨딩은 자연을 성전 삼아 치르는 새로운 의례다. 드론으로 촬영하는 웨딩 영상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신의 시점을 욕망하는 듯하다. 주례가 사라지는 현상을 단순히 ‘요즘 젊은이가 어른 공경을 모른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본질을 놓친다. 이는 권위 자체에 대한 근본적 의문에서 출발한다. 과거에는 나이와 지위, 학식과 경험이 자동으로 존경을 담보했다. 하지만 정보화 시대에는 구글 검색이 어떤 원로의 지혜보다 빠르고 정확한 답을 준다. 수직적 위계보다 수평적 네트워크가, 일방적 훈수보다 쌍방향 소통이 더 익숙한 세대에게 ‘주례의 말씀’은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더욱이 ‘존경할 만한 어른’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약해졌다. 과거에는 촌장이나 교장, 목사 같은 권위 있는 인물이 자명했지만, 지금은 누구를 ‘인생 선배’로 인정할지조차 개인의 선택 사안이 되었다. 권위의 민주화, 혹은 권위의 해체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런 변화 앞에서 세대별 반응은 예상할 만하다. 기성세대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결혼이 개인적 사랑 이야기로만 축소되는 것 같아 아쉽다. 과거에는 온 동네가 함께 책임지는 일이었는데….” (60대 전직 교사 김모씨)
“주례사를 들을 때는 정말 ‘결혼한다’는 실감이 났는데, 요즘 식은 그냥 파티 보러 가는 기분이다.” (55세 회사원 박모씨)
반면 결혼 당사자의 목소리는 사뭇 다르다. “우리만의 스토리가 담긴 식을 올려서 매우 만족한다. 부담스러운 격식 없이 자연스럽게 축복받는 기분이다.” (30대 초반 신혼부부 이모씨)
“자유롭고 편안했지만, 가끔은 뭔가 부족한 느낌도…. 결혼이 단순한 이벤트는 아닌 만큼, 좀 더 무게 있는 순간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29세 신부 정모씨)
흥미롭게도 중간 세대인 40대는 양쪽을 모두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인다.
“전통도 소중하지만, 젊은이의 선택도 존중해야 한다. 다만 결혼의 의미까지 가벼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45세 직장인 최모씨)
결혼식의 변화를 마냥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형식의 자유로움은 부부의 개성과 이야기를 더 생생하게 담아낸다. 권위에 기댄 엄숙함보다 진정성 있는 기쁨이 넘쳐흐른다. 획일화된 틀을 벗어나 다양한 문화와 취향이 어우러지는 모습도 아름답다. 하지만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공동체의 승인과 책임, 인생 전환점으로서의 무게감이 희미해지고 있다. 결혼이 사적 이벤트로만 소비될 때 그 사회적 의미와 지속력도 함께 가벼워진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의례의 해체가 의미의 해체로 이어질 가능성이다. 형식이 사라지면 내용도 함께 증발할 수 있다. 결혼이 ‘좋을 때만 함께 있는 동거’와 구별되지 않는다면, 과연 굳이 결혼이라는 제도가 필요할까. 이런 근본적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아마도 미래의 결혼식은 과거의 장엄함과 현재의 자유로움을 절묘하게 블렌딩한 형태가 될 것이다. 주례는 사라질지 몰라도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은 남아있을 것이고, 형식은 간소해져도 ‘공동체의 축복’은 계속될 것이다. 모던 재즈가 클래식의 기법을 자유롭게 해석하듯, 새로운 세대의 결혼식도 전통의 에센스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탄생시킬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게 있다. 변화하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사랑과 약속, 축복과 희망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본질적 가치가 새로운 형식에서도 빛을 잃지 않도록, 우리는 계속해서 의례의 의미를 되새기고 재창조해야 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지만, 그 마음을 담는 그릇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조선비즈발췌)
통과의례로서 결혼식이 지닌 힘은 네 개의 기둥 위에 서 있었다.
첫 번째는 ‘공적 선언의 마법’이다. 침실에서 나눈 속삭임이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선언이 되는 순간, 사랑은 법적·사회적 보호막을 얻는다. 더 이상 변덕이나 충동의 영역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의 세계로 입성하는 것이다. 사적 영역의 은밀함이 공적 영역의 당당함으로 탈바꿈하는 드라마틱한 순간이다.
두 번째는 ‘상징의 마법’이다. 반지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다. 무한의 원을 그리며 영원한 사랑을 담는 그릇이 된다. 서약은 평범한 말이 아니라 미래를 묶는 주문이 된다. 절과 인사는 과거 세대의 지혜와 축복을 현재로 끌어오는 의식이다. 연금술사가 납을 금으로 변화시키듯, 평범한 사물이 의미의 보석으로 변신한다.
세 번째는 ‘공동체 승인의 마법’이다. 가족과 친지의 박수는 단순한 축하가 아니다. ‘우리가 이 결합을 인정하고 지켜보겠다’는 사회적 보증서다. 외로운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부부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수백 명의 하객이 무언의 증인이 되어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법정에서처럼 엄숙하게 지켜보는 것이다.
네 번째는 ‘변화의 마법’이다. 의례는 단순히 현실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창조한다. 결혼식을 치르기 전과 후의 ‘나’는 존재론적으로 다른 존재가 된다. 심리적으로도 정체성이 강화되고,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여는 용기를 얻는다. 어제까지의 ‘나’와 내일부터의 ‘우리’ 사이에 놓인 마법의 다리가 바로 결혼식인 셈이다.
결혼식 본질적 가치 되새기며 재창조해야
그런데 요즘 결혼식 풍경을 보면 묘하다. 주례는 사라지고, 정해진 순서는 부부의 플레이리스트로 대체된다. 하객은 경건한 증인에서 인스타그램용 사진을 찍는 관객으로 변모했다. 결혼식이 ‘평생의 서약식’에서 ‘하루의 파티’로 성격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유행의 변화가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거대한 시대정신이 결혼식장에도 상륙한 것이다. 절대적 권위에 대한 의심, 보편적 진리에 대한 거부감,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문화가 예식장의 단상에서도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모더니즘 시대의 결혼식은 클래식 음악회 같았다. 정해진 악보, 격식 있는 연주자, 경건한 청중.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고 예측 가능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의 결혼식은 재즈 세션에 가깝다. 즉흥 연주, 자유로운 해석, 관객도 함께 참여하는 인터랙티브한 무대. 때로는 실험적이고 파격적이어서 기성세대의 눈썹을 찌푸리게 하기도 한다. 야외에서 벌어지는 스몰 웨딩은 자연을 성전 삼아 치르는 새로운 의례다. 드론으로 촬영하는 웨딩 영상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신의 시점을 욕망하는 듯하다. 주례가 사라지는 현상을 단순히 ‘요즘 젊은이가 어른 공경을 모른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본질을 놓친다. 이는 권위 자체에 대한 근본적 의문에서 출발한다. 과거에는 나이와 지위, 학식과 경험이 자동으로 존경을 담보했다. 하지만 정보화 시대에는 구글 검색이 어떤 원로의 지혜보다 빠르고 정확한 답을 준다. 수직적 위계보다 수평적 네트워크가, 일방적 훈수보다 쌍방향 소통이 더 익숙한 세대에게 ‘주례의 말씀’은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더욱이 ‘존경할 만한 어른’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약해졌다. 과거에는 촌장이나 교장, 목사 같은 권위 있는 인물이 자명했지만, 지금은 누구를 ‘인생 선배’로 인정할지조차 개인의 선택 사안이 되었다. 권위의 민주화, 혹은 권위의 해체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런 변화 앞에서 세대별 반응은 예상할 만하다. 기성세대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결혼이 개인적 사랑 이야기로만 축소되는 것 같아 아쉽다. 과거에는 온 동네가 함께 책임지는 일이었는데….” (60대 전직 교사 김모씨)
“주례사를 들을 때는 정말 ‘결혼한다’는 실감이 났는데, 요즘 식은 그냥 파티 보러 가는 기분이다.” (55세 회사원 박모씨)
반면 결혼 당사자의 목소리는 사뭇 다르다. “우리만의 스토리가 담긴 식을 올려서 매우 만족한다. 부담스러운 격식 없이 자연스럽게 축복받는 기분이다.” (30대 초반 신혼부부 이모씨)
“자유롭고 편안했지만, 가끔은 뭔가 부족한 느낌도…. 결혼이 단순한 이벤트는 아닌 만큼, 좀 더 무게 있는 순간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29세 신부 정모씨)
흥미롭게도 중간 세대인 40대는 양쪽을 모두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인다.
“전통도 소중하지만, 젊은이의 선택도 존중해야 한다. 다만 결혼의 의미까지 가벼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45세 직장인 최모씨)
결혼식의 변화를 마냥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형식의 자유로움은 부부의 개성과 이야기를 더 생생하게 담아낸다. 권위에 기댄 엄숙함보다 진정성 있는 기쁨이 넘쳐흐른다. 획일화된 틀을 벗어나 다양한 문화와 취향이 어우러지는 모습도 아름답다. 하지만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공동체의 승인과 책임, 인생 전환점으로서의 무게감이 희미해지고 있다. 결혼이 사적 이벤트로만 소비될 때 그 사회적 의미와 지속력도 함께 가벼워진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의례의 해체가 의미의 해체로 이어질 가능성이다. 형식이 사라지면 내용도 함께 증발할 수 있다. 결혼이 ‘좋을 때만 함께 있는 동거’와 구별되지 않는다면, 과연 굳이 결혼이라는 제도가 필요할까. 이런 근본적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아마도 미래의 결혼식은 과거의 장엄함과 현재의 자유로움을 절묘하게 블렌딩한 형태가 될 것이다. 주례는 사라질지 몰라도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은 남아있을 것이고, 형식은 간소해져도 ‘공동체의 축복’은 계속될 것이다. 모던 재즈가 클래식의 기법을 자유롭게 해석하듯, 새로운 세대의 결혼식도 전통의 에센스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탄생시킬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게 있다. 변화하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사랑과 약속, 축복과 희망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본질적 가치가 새로운 형식에서도 빛을 잃지 않도록, 우리는 계속해서 의례의 의미를 되새기고 재창조해야 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지만, 그 마음을 담는 그릇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조선비즈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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